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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베트남미디어

[안경환칼럼] 신숭겸(申崇謙) 장군과 레라이(Lê Lai) 장군

위왕대사(爲王代死)한 고려와 베트남의 충신

 

한국의 성씨 가운데 약 70여만 명의 종원을 가진 평산(平山) 신(申)씨의 시조가 한민족의 역사에 위왕대사(爲王代死)하고 고려 태조 왕건의 목숨을 구한 신숭겸(申崇謙) 장군이다. 베트남의 역사에도 왕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이 있다. 베트남 역사에는 레(黎) 왕조(1428~1788) 태조 레러이(黎利)의 목숨을 구한 레라이(Lê Lai) 장군이 있다.

 

베트남은 B.C 179~A.D 938년까지 1117년간의 식민 지배를 받고 남한(南漢)의 군사를 물리치고 독립하였다. 독립후 319년 만에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이 남방정책을 펼치면서 1257년, 1284년, 1287년 모두 3차례나 베트남을 침략하였다. 베트남의 쩐흥다오(陣興道) 장군은 3차례의 몽골 침략을 모두 물리쳤다.

 

세계 역사에 몽골의 침략을 물리친 민족은 베트남이 유일무이하다. 베트남은 몽골과의 전쟁에서 3차례 모두 승리하였으나, 농민들이 전쟁에 장기간 동원되면서 모내기와 추수를 제때 못하고, 물 관리가 안 되어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게다가 중부지역의 짬빠국의 침략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피폐되었고, 왕위계승 문제로 갈등이 깊어져 백성들은 극도로 궁핍해졌고 정치는 대혼란에 빠졌다.

 

레(黎) 태조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린 레라이(Lê Lai) 장군

이러한 혼란을 틈타 호뀌리가 쩐(陣) 왕조를 폐하고 호(胡)씨 왕조(1400~1407)를 세웠다. 이를 기회로 명(明)나라가 침략하여 호(胡)씨 왕조는 겨우 7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다시금 중국 명나라의 침략으로 중국의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이에 각 지방에서는 명나라 침략에 항거하는 항쟁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중에서 1418년 타인호아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킨 레러이(Lê Lợi-黎利:1385~1433) 장군이 명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베트남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레(黎)왕조(1428~1788년)를 창건했다. 레러이는 타인호아성(省), 람선 지방의 토호로 명나라 군사와 10년간의 투쟁 끝에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한 민족 영웅이다.

 

1419년 어느 날 명나라 군사와 전투를 하기 위하여 나간 레러이는 하이즈엉성(省), 찌린(Chí Linh)에서 명나라 군사에 포위되어 생명이 위급하게 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 응우옌턴(Nguyễn Thân)장군이 나서서, “제가 어의(御衣)를 입고 코끼리를 타고 나가 명나라 군사와 대적할 터이니, 그 틈을 이용하여 대왕께서는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소서”하며 레러이 장군의 피신을 간청하였다.

 

응우옌턴 장군의 기개와 충의에 감동한 레러이는, “응우옌턴(Nguyễn Thân) 장군이 나를 대신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있으니, 향후 나와 나의 후손들이 행여 장군의 공(功)을 망각한다면, 궁궐을 황폐화하고, 옥새(玉璽)를 쇳덩이로 만들어버리고, 예리한 칼날이 짐을 향하여 반역하게 하소서!”라고 하늘에 고하며 그의 충절을 잊지 않도록 맹서하였다.

 

그리고 레러이는 자신의 성(姓)씨인 레(Lê)씨를 응우옌턴 장군에게 하사하고, 이름도 라이(Lai)라고 명명하여 자신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레라이(Lê Lai)로 부르게 하였다. 이리하여 레라이(Lê Lai) 장군이 황룡포(黃龍袍)를 입고 나가 싸우니, 명나라 군사는 레라이(Lê Lai)를 평정왕 레러이(Lê Lợi)로 알고 일거에 달려들어 사로잡았다. 사로잡고 보니 레러이가 아니라 응우옌턴(Nguyễn Thân) 장군, 바로 레라이였다. 명나라 군사에 의해 잡힌 레라이는 극형에 처해졌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레러이는 천신만고 끝에 명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레(黎)왕조를 세웠다. 레러이(Lê Lợi)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레라이(Lê Lai) 장군의 충의정신을 기려 군사를 총괄하는 직책인 태위(太尉)로 추증하고, “내가 죽거든 나보다 하루 먼저 레라이 장군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레러이 대왕의 기일은 음력 8월 22일이고, 레라이 장군의 기일은 음력 8월 21일이 되었다. 그래서 베트남 민간에서는 “21일은 레라이(Lê Lai)요, 22일은 레러이(Lê Lợi)다.”라는 말이 구전되고 있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 장군

한민족에도 베트남의 레라이 장군보다 약 5백 년이나 앞서 위왕대사한 인물이 있다. 바로 평산(平山) 신(申)씨 시조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 장군이다. 장절공은 한민족 역사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이어 두 번째로 통일 위업을 달성한 고려 500년 역사의 최고 공신이다.

 

신숭겸 장군은 궁예가 건국한 태봉국의 기병 대장군으로,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서 탄생했다. 장군은 918년 왕건과 함께 고려를 개국했으나 927년 11월 왕건이 대구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甄萱)의 군대에 포위당해 위험에 처하자, 신숭겸 장군은 태조 왕건의 갑옷으로 바꿔 입고 장렬히 싸우다 왕건을 대신해 전사하였다.

 

신숭겸 장군이 어의를 입고 위장술을 펼치는 동안 왕건은 견훤 군대의 포위망을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장절공의 기지로 목숨을 건진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초석을 다져 936년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으며, 고려 500년의 왕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만약 신숭겸 장군이 왕건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다면 후삼국 통일은 어찌 되었을까? 신숭겸 장군의 충의정신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한 것이다.

 

B.C 57년부터 경주를 중심으로 A.D 935년까지 56명의 임금이 992년간이나 이어온 동양에서 최장기 왕국이 신라인데, 51대 진성여왕이 887년부터 10년간 집권하는 동안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견훤이 892년 후백제 부흥을 부르짖으며 광주(무진주)를 점령하였고, 궁예는 견훤보다 1년 먼저 고구려의 부흥과 신라 타도를 목표로 죽산(죽주)을 장악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스스로 임금이라 칭하니, 신라·후백제·후고구려의 후삼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후고구려를 건립한 궁예의 세력이 날로 강대해지자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고쳤다가 911년에 다시 태봉(泰封)으로 바꾸고,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며 도읍지를 옮기면서 학정을 일삼자, 궁예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축출하고 왕건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였고, 왕건은 개경(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

 

경쟁 관계인 고려가 신라와 동맹을 맺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후백제의 견훤은 두 나라의 동맹을 깨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였다. 견훤이 927년 9월에 경주의 관문인 영천(고울부)을 공격하자, 다급해진 신라는 고려에 긴급 원병을 요청하였다. 경주를 점령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즉위시켰다.

 

이에 왕건은 군사 5천을 이끌고 경주로 내려가는 도중에 팔공산 동수에서 견훤의 군사와 대접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의 군사에 포위되어 생명이 위급하게 되었고, 신숭겸, 김락 등 8명의 장수를 잃었고 5천 명의 군사들도 대부분 전멸하였다.

 

이때, 신숭겸 장군의 기지로 왕건과 갑옷을 바꿔 입고 싸우는 동안, 왕건은 적의 포위망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신숭겸 장군은 혼신의 힘을 다 했으나, 견훤의 군사에 잡혀 결국 목이 잘리고 말았다. 그래서 태조 왕건은 춘천 비방동 화악산에 신숭겸 장군의 묘에 장군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였다.

 

신숭겸 장군의 머리는 장군이 타던 애마(愛馬)가 물고 고향 곡성에 있는 동리산(桐裏山)으로 달려와 이를 본 태안사 스님들이 동문수학하던 장절공의 머리임을 확인하고 스님들이 비밀리에 장례식를 치르고 매장하였다.

 

현재 평산(平山) 신(申)씨 시조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인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에 있는 덕양서원(德陽書院)은 호남지역에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위치한 월봉서원(1578년 창건. 고봉 기대승 추모) 다음으로 오래된 역사를 지닌 전남지역의 3대 사액(賜額)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덕양서원 전경(신인현 도유사 제공)

 

덕양서원은 1695년 조선 숙종 21년에 ‘德陽(덕양)’이라는 이름을 사액 받아 사액서원으로 지정되었고, 1981년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5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덕양서원의 도유사는 평산 신씨 후손으로 전) 조선대 교수로 교수평의회 의장과 전국사립대학교 교수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신인현(申仁鉉) 교수가 맡아, 시조 장절공의 현창 사업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처럼 한국, 베트남의 역사에 왕을 위해 목숨을 버린 충신들이 있다. 그들이 있었음으로 왕조가 이어져 왔고 민족정신이 계승되어왔다. 이들의 고매한 충의정신을 이어가도록 고양시키는 것은 국운을 번성하게 하는 산 역사 교육이 될 것이다.

 

베트남은 대도시마다 도로에 “레라이”이름을 딴 도로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다. 그의 충의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후세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한국에는 곡성군의 신숭겸 장군 태생지에서 압록까지, 춘천의 묘역 앞 도로와 대구의 표충사 앞 도로 3곳이 “신숭겸 장군로”로 지정되어 있다.

 

베트남 민족과 한국 민족이 선인들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방법이 엇비슷하면서도 깊이가 다름을 엿볼 수 있다.

 

신숭겸 장군의 충의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무공훈장에 “장절(壯節)무공훈장“을 추가하고, 덕양서원을 3군 사관학교 생도들의 답사일정에 넣어 매년 탐방하도록 하여 무인들의 충의정신을 고양시키고, “신숭겸장군로”를 치유의 둘레 길로 널리 홍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베트남과의 우호관계 진작 차원에서 인류사에 충의정신을 우뚝 세운 레라이 장군 가문과 평산(平山) 신(申)씨 가문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나라가 바로 서려면 위왕대사(爲王代死)한 충신들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충의정신이 살아있어야만 국민통합과 공정한 대한민국은 물론, 자국 우선주의와 패권주의로 치닫고 있는 냉엄한 국제정세 속에서 진정한 독립국가가 되고 남북통일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고

안경환(安景煥)

전) 조선대 교수

하노이 명예시민

KOVECA 상임고문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 석사 및 박사

베트남 우호훈장 수훈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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